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빌헬름 1세 (문단 편집) === 즉위 전 === 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Wilhelm_%28Heusinger%29.jpg|width=300]] [[1810년]]. 왕자 시기. [[파일:루이제 왕비와 아들들.jpg|height=400]] 어린시절에 어머니 [[메클렌부르크슈트렐리츠의 루이제|루이제 왕비]], 형 [[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]](오른쪽)와 함께 산책하는 빌헬름 1세. [[1797년]] [[3월 22일]] [[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]]와 루이제 왕비 사이의 [[차남]]으로 출생하였다. 왕국의 전통에 따라 어린 나이부터 프로이센군의 장교로 복무하며 [[나폴레옹 전쟁]]에 참전하여 [[대육군]]과 맞서 싸웠고, 이후 평생을 군인으로 보내다가 2살 위의 형 [[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]]가 아들이 없어서 후계자가 되었다. [[3월 혁명|1848년 3월 혁명]] 때는 강경 진압을(대포로 진압을 명령) 주장해서 '총알 왕자(또는 포도탄 왕자)'라는 별명을 얻었고 혁명군의 살해 위협에 [[영국]]으로 망명하기도 하는데 이 당시 역시 강경 진압을 부르짖은 [[오토 폰 비스마르크]]를 눈여겨보게 된다. 당시 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즉위 전 자유주의 성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고, 군주주의자와 반동 복고 세력의 바람과 따로 놀았는데 혁명이 터지자 진압에 주저하고, 혁명군에 사로잡혀 굴복하게 되자 [[융커]]들을 비롯한 보수 반동 세력의[* 이 당시 보수세력은 경제적 자유주의(Laissez-faire)와 오히려 반대 입장이다 토지 귀족들은 고관세 국가 개입주의다. 당시 이들에게 입헌 국민주권 민족주의 자유주의 등은 불순 사상이다.] 많은 인사들이 겁많고 나약한 국왕에 실망하고 왕태제 빌헬름 왕자에 주목하게 된다. 결국 혁명이 나가리되자 다시 프로이센으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혁명 이후 [[올뮈츠의 굴욕|외교적으로 오스트리아의 독일권 내 주도권 주장에 굴복]]하는 등 실망스런 통치 기간을 보냈고 결국 60세가 되는 해(1857년)에 [[정신병]]이 발작해서 통치가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빌헬름 왕자는 형을 대신해서 [[섭정]]을 하게 되었다. 이후 1861년 왕위에 올랐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